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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해수 (2002-07-17 13:40:41, Hit : 5800, Vote : 838
 두 사람의 파르지팔에 대한 견해

안녕하십니까. 무와산방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파르지팔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이 있어 몇자 적었습니다. 다음 글은 저의 견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졸저 「신의 소리를 훔친 거장」을 거듭 찍을 기회가 생긴다면 그 때 바그너편에 추가로 넣을 계획입니다.

파르시팔은 인간이 해결해야 할 대립되는 가치를 탐구하고 있는 악극입니다.
사람은 선과 악의 양면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만일 인간이 날 때부터 천사였다면 나쁜 짓은 몰랐을 것이며 악마였다면 처음부터 사악한 행위와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크가 만든 ‘파르지팔’ 영상물은 시사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여기에는 두 사람의 파르지팔이 등장하지요. 쿤드리의 유혹을 받고 이를 이겨내기까지는 남성 파르지팔이 나오고 그 이후는 남장여인 파르지팔이 나옵니다. 그리고 성창을 갖고 암포르타스를 치료할 즈음에서 두 사람이 함께 나오지요.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들이 서로 포옹하기도 하는데 이 장면은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기가 막힐 정도로 뛰어난 연출법이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악극이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것이라면 두 사람의 파르지팔은 한 사람이 지닌 두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순진무구하기 때문에 더럽혀지기 쉬운 파르지팔, 보다 높은 가치를 실현하려는 성숙된 파르지팔, 또 있지요. 두 번째 파르지팔은 그의 여성적 자아로서 쿤드리의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실 두 사람은 한 사람의 다른 얼굴이지요. 연극학에서는 ‘리얼리티의 환상’이란 용어가 있다지만, 그렇다면 이것은 ‘환상의 리얼리티’입니다. 예를 들어 영상 연출법에 있어서 귀신이나 망령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려면 이중 노출이나 무서운 분장을 해서 보여주는 것 보다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이 보다 효과적입니다. 그렇다면 한 인격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자아를 보여주려면 또 하나의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일면 당혹스런 느낌을 주긴 해도 백번 설명하는 것 보다 생생하게 와 닿아요.
이 연출법을 가장 극적으로 사용한 영화인이 스웨덴의 작가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인데 그가 1982년에 만든 ‘화니와 알렉산더’는 그 가운데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란 영화를 보았겠지요. 만일 그 영화에서 지킬 박사가 용모와 성격에서 전혀 다른 인물로 변하지 않고 성격만 바뀐다던지 또는 대부분 해설에 의지한다면 무슨 재미를 기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루이 브뉘엘 감독이 만든 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보면 한 여주인공의 성격 안에 있는 열정적인 면과 이지적인 면을 두 사람의 배우가 상황에 따라 나누어 연기하고 있는데 참으로 입체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연출법은 악극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두 사람의 가수에게 노래부르게 하는 더불 캐스트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따라서 만일 바그너가 이 영상물을 보았다면 당혹스러워했다기 보다는 탄복을 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악극은 인간의 양면성을 그린 것이기에 등장인물 역시 이원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그너는 가로 축으로 설정한 인물구도에서 클링조르를 현재(顯在) 욕망, 파르지팔을 현재 양심으로 표현하였고 쿤드리를 잠재(潛在) 욕망, 암포르타스를 잠재 양심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세로 축으로 하여 파르지팔을 성숙된 자아와 성숙후 자아로 나누었으며 쿤드리 역시 요부로 조종되는 여성과 자신을 통제하는 깨어난 여성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인지 1961년 카라얀이 빈에서 연출한 실황 무대에서는 두 명의 쿤드리를 등장시켰지요.
또 있습니다. 지버베르크가 연출한 '파르지팔’에 나오는 남장여인 파르시팔이 있지요. 그는 다름아닌 파르시팔로 위장한 쿤드리의 대리 자아입니다. 말하자면 쿤드리는 파르지팔의 또 다른 페르소나, 즉 역할가면인 셈으로 한 사람 안에 존재하는 확연히 다른 모습의 인격입니다. 저는 졸저에서 바그너의 인성면에는 여성적인 성격 요소가 두드러져 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사람의 인격은 연륜이 더해지면서 변모합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 여러 페르소나를 쓰고 나타나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연출법은 한 인물이 지닌 두 성격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려는 시도가 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파르지팔이 포옹하는 장면과 쿤드리가 죽는 장면은 분열된 자아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분열된 자아(Ego)가 하나의 자신(Self)으로 통합되는 과정은 그 자체가 일종의 의례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가 하나를 지양하여 보다 큰 하나를 만드는 변증법적 발전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고 보면 인간의 이중성을 다룬 이야기는 파우스트 전설과 흙인간 골렘(Golem)에 관한 유태민족의 전설, 분열된 자아가 서로 싸우는 도플갱어(Doppleganger)의 모티브 등 꽤 있습니다. 또 이를 소재로 한 소설과 영화도
많이 만들어졌지요. 그러고 보면 바그너는 양면적 성격에서 두드러진 인물입니다. 그는 유태인에 대해서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고 여성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가치관을 가졌지요. 뿐만 아니라 기질과 심성에서도 모순되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파르지팔은 ‘온통 근육이지만 텅빈 두뇌(All muscle but No brain)형’의 어리석은 영웅에서 ‘근육질이면서 현명한 두뇌(All muscle and well brain)형’의 사려 깊은 영웅으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지크프리트와는 구별되는 인물이지요. 지크프리트는 욕심을 자제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 때문에 자멸하지만 파르지팔은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구도자로 거듭 났기에 정신의 승리자가 됩니다. 바로 이 점이 둘 다 약점 있는 영웅임에도 각자의 운명을 갈라놓게 하는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파르시팔은 바그너가 지향한 이상형의 영웅상입니다. 어째서 이 악극이 바그너가 음악으로 쓴 고백록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겠지요.
한편 쿤드리로 말하자면 자신에게 주어진 요부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싶어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쿤드리의 행로를 보면 고대 이짚트나 그리스 등지에 있었던 신전 매음이 떠올려집니다. 그리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는 꽃의 정원은 매음이 행해지던 신전을 떠올리게 하고요. 그들은 윤락녀나 직업여성도 아니었으며 그 중에는 신분이 높은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전을 찾는 이들에게 성적 봉사를 하고 그로부터 얻은 보수를 대부분 공공 건물의 건설비로 쓰게 하였지요. 그런 다음 그들은 그 의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쿤드리 역시 순진한 파르시팔을 유혹함으로써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려고 하지요.
저는 쿤드리의 유혹이 파르지팔의 심성을 더럽히려고 한데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그것은 이성(異性)을 깨닫게 하려는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우둔한 파르지팔을 깨우쳐 성숙된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상징적 행동으로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성에 눈뜨는 한편 수치심을 깨닫게 되는 것에 비유됩니다. 하지만 파르지팔은 쿤드리를 거부함으로써 두 사람 모두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여기서 쿤드리가 파르지팔에게 한 입맞춤은 유혹의 몸짓이기 보다는 섹스의 질곡을 경계하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행하는 범죄 가운데 성범죄가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높습니까. 파르지팔은 이성애를 유보하였기에 인간애를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쿤드리는 클링조르가 위장한 가면이라기 보다는 파르지팔의 그림자 자아이면서 그에게 교훈을 주는 객체적 자아(Looking-glass I)입니다.
결국 파르지팔은 쿤드리의 유혹을 극복함으로써 원죄를 통한 자각이 아닌 인내를 통한 자각의 길에 이르게 되지요. 그것은 감각에 의한 느낌이 아니라 지각에 의한 깨달음이며 육체적 쾌락이 아닌 정신적 희열입니다. 그래서 파르지팔이 이룬 성취는 고매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만일 파르지팔이 쿤드리의 유혹을 받아들였다고 가정합시다. 그랬다면 두 사람 모두 어리석은 자와 요부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며 설사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이 드라마틱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는 외에는 이 악극이 전달하고자 했던 숭고한 의미는 반감되었을 것입니다.
이상 몇자 적었습니다. 다른 분들의 좋은 의견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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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지팔이 남녀 2명이 나오는 이유

  두 사람의 파르지팔에 대한 견해  오해수   2002/07/17 5800 838
      반갑습니다.  무와산방   2002/07/19 3227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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