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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태웅 (2002-02-21 10:18:19, Hit : 5679, Vote : 816
 ★★ 파르지팔과 무의식(Parsifal und Unbewusstheit)

2001/07/16 (16:55)



<파르지팔>을 가지고 이 정도로 생각해 보는 것도 오랫만이네요. (^^;)

<파르지팔>에 있어서 'Phantasmagorie'와 '무의식'과의 관계를 <파르지팔>에서의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본 것입니다. 인터넷상의 바그너 모임인 청년 바그네리안(http://www.freechal.com/wagnerian)에 올린 글이기도 합니다.

1. 들어가는 말

아도르노(Adorno, Theodor W.)가 바그너를 비판한 글 중 '판타스마고리(Phantasmagorie)'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즉, 바그너의 종합 예술 작품(Gesamtkunstwerk)은 궁극적으로 이 '판타스마고리'와 연결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요술 등의 방법을 통하여 만들어진 시각적 착각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아도르노는 특히 <파르지팔>에 있어서 이 요소가 가장 심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덧붙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도르노의 이러한 관점은 <파르지팔>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인 흡인력(물론 <파르지팔>이라는 작품 자체를 좋아하시지 않는 분께는 전혀 통하는 말이 아니긴 합니다만…)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파르지팔>이 그리고 있는 세계는 결국 이 '판타스마고리'―즉 '비현실적인 것의 절대적 현존'―라는 것에 가장 적확하게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저는 <파르지팔>에서 '판타스마고리'라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느낄 수 있는 요소인 (작품 내부에서의) 시공간의 흐름에 입각하여 <파르지팔>이라는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무의식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 <파르지팔>의 전사(前事)에서 알 수 있는 '판타스마고리'

이 곳에 적을 두고 계시는 모든 분들께서 주지하시다시피 이 작품은 사건의 발단으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진행된 상태에서 막이 오르게 됩니다. 이전에 있었던 성배와 성창의 전달, 그리고 성배 수호 기사들의 모집, 클링조르의 등장 및 그의 축출, 젊은 암포르타스의 이야기 등이 막이 오르기 전의 전사(前事)가 되는데, 여기에서부터 이미 우리는 의문점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과연 성배가 지상에 전래된 이후 막이 오르기까지 과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에 대한 것부터 시작하여 티투렐과 암포르타스가 과연 얼마나 살아 있었는지에 이르기까지 이미 전사의 과정에서부터 막이 오를 때까지 지나 온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의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의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으나 사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아무도 모른다'입니다. 당장 티투렐은 아주 오래 전에 하늘에서 성창과 성배를 받았을 것이지만 이것을 계속 지켰기 때문에 이 보물들로부터 힘을 얻어 막이 오르는 시간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다는 의견부터 성배의 전래는 성배의 발견에서 시작한다는 켈트 민담 중에서 성배의 탐색에 관한 이야기로 결론을 내 보려는 시도 등 여러 가지의 해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답이 나오지 않을 이 의문들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위의 의문에 대해 확답을 할 수 없음을 더욱 잘 알게 됩니다. 더군다나 극 자체에 언급되어 있는 공간적 배경 및 시간적 배경의 설명에는 "중세 어느 시기의 몬살바트 성(스페인 북부 이베리아 산맥의 어느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하지만 역시 실존하는 지역은 아닙니다)"이라고만 언급되어 있을 뿐입니다. 보통의 시간 관념으로 이러한 것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은 바로 실체가 없는 것에 실체를 부여해 보려는―F. 베이컨의 '우상론'에서 인용해 보면 "극장의 우상"에 해당되는― 시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의문점을 확실하게 해결하는 것은 도입에서 말씀드렸던 '판타스마고리'인 것입니다. 몬살바트라는 지명(지역)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점, 하지만 작품을 감상하려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이미 <파르지팔>이라는 작품의 막이 오르기도 전부터 이미 이 '판타스마고리'에 무의식적으로 빠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작품이 우리에게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3. 각 막의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시공간의 흐름과 '판타스마고리'와의 관계

<파르지팔>이라는 작품은 이미 전사(前事)의 단계에서부터 이미 '판타스마고리'의 수용 없이는 작품 안에 입장할 수 없다고 기술한 바 있습니다. 다행히도 이 전사는 1막과 3막에서 구르네만츠에 의해 설명이 되지만 이것만으로는 사건의 시간적 선후 관계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 구체적인 시간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파르지팔>에서는 막 사이의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단서를 전혀 남겨놓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1막이 보다 이전에 일어난 사건이고 3막은 보다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며, 그리고 2막은 1막과 3막의 사이에 일어난 사건―지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는―이라는 것 외에는 구체적으로 그 시간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에 대한 두 가지의 예를 살펴봅시다:

① 1막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파르지팔이 성배의 성에서 쫓겨나는데, 2막의 1/3정도에서 클링조르의 마성에 다다르게 되는데, 성배의 성 몬살바트에서 산 하나 건너 있다는 이방인의 땅에 이 마성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거리(공간의 변화)에 대한 단서가 없으며 또한 파르지팔이 몬살바트에서 클링조르의 마성까지 오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는가(시간의 변화)에 대한 단서 또한 없습니다. 게다가 파르지팔은 클링조르의 마성에 어떻게 올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까지 남지만 이것은 시공간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으니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② 2막의 마지막과 3막의 시작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는지도 실질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파르지팔이 오랫동안 성배의 성으로 향하는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였다는 것에서 미루어 보아 최소한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은 짐작을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추측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파르지팔이 방황한 장소를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도 의문점은 남아서 파르지팔은 과연 어떻게 돌아다녔기에 1막과 2막 사이에서 '그토록 쉽게 찾아갔던' 길을 어째서 찾지 못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역 최고의 파르지팔 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제임스 레바인 또한 이러한 의문을 던졌고, 그에 대해 답하기를 '아무도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사건들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이 또한 '판타스마고리'에 입각한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전혀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사건"―보통의 합리주의적인 사고라면 이렇게 부족한 단서를 가지고 이러한 것들을 추리해 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들이 <파르지팔>이라는 작품을 통하여 그 실체가 "현존"하고 있는 것은 바로 '판타스마고리' 그 자체입니다. <파르지팔>이라는 작품 내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거시적인 흐름에서도 이 '판타스마고리'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4. 각 막의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시공간의 흐름과 '판타스마고리'와의 관계

<파르지팔>이라는 작품은 전사에서부터 거시적인 시공간의 흐름에 이르기까지 '판타스마고리'의 커다란 흐름을 타고 있다는 것을 위의 내용에서 기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각 막 안에서의 시간적인 흐름은 미시적인 장면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만한 시공간의 흐름을 보여 주는 부분이 곳곳에 산재합니다.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① 우선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을 대사와 같이 소개합니다:
"Gurnemanz; Du siehst, mein Sohn, zum Raum wird hier die Zeit(구르네만츠; 나의 아들아, 보다시피 이곳에서는 시간이 공간으로 된단다)."
이 대사는 주지하고 계시는 대로 1막의 장면 전환 음악이 연주되기 직전에 나오는 구르네만츠의 대사입니다. 이 대사가 이루어질 때는 이미 한낮이라는 전제 조건이 있고 나중에 성배의 전당은 점점 어두워지면서 1막의 마지막 장면은 가수들을 인식할 수 있는 스포트라이트만이 있는 상태입니다. 구르네만츠가 파르지팔을 성배의 전당으로 인도해 오고 성찬에 참여시키는 것은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본문에서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실질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② 1막에서 쿤드리가 잠이 든 후 2막에서 클링조르의 마성으로 '텔레포트'를 하게 되는데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원래의 설정을 보면 거울 속으로 쿤드리를 보던 클링조르가 거울 속에서 이전의 1막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법의 힘(이것은 유도 동기를 분석해 보면 금방 드러나는 구조입니다)으로 재워 둔 쿤드리를 꺼내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클링조르가 잠이 든 쿤드리를 이미 거울 속에 가두어 두었던 것인지, 아니면 풀섶 뒤에서 잠이 든 쿤드리를 거울로 비추어 본 클링조르가 자신의 마법을 한번 더 사용해서 쿤드리를 거울에서 꺼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행동입니다.
③ 1막에서 파르지팔이 등장하고 파르지팔-구르네만츠-쿤드리, 이 세 사람만이 무대에 남았을 때 파르지팔의 성장 배경이 언급됩니다. 여기에서 파르지팔은 황야(Oeden)에서 자랐고 사막과 골짜기를 거쳐서 몬살바트의 영지까지 오게 됩니다. 그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단지 밤과 낮의 반복이었다는 말 이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④ 한편 1막과 2막에서 알 수 있는 쿤드리의 과거사로는 '헤로디아스(Herodias)', '저 세상의 군드리기아(Gundryggia dort)', 이 세상의 쿤드리(Kundry hier) 등의 언급이 있으며, 기본적인 설정을 살펴 보면 이미 성배의 성이 건립될 당시부터 그녀는 몬살바트의 여자 전령으로 봉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 어느 곳에도 쿤드리의 나이나 생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⑤ 역시 쿤드리에 대한 것입니다. 쿤드리는 몬살바트 성이 건립되었을 당시 선왕 티투렐의 손에 의해 구조된 이후 얼마간 성배의 성에서 여자 전령으로 봉사하다가 어느 날 돌연 실종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간(?) 지나서 암포르타스가 옆구리에 상처를 입고 돌아왔을 무렵 다시 성배의 성에 나타나서 다시 여자 전령으로서 봉사합니다. 이 기간 동안의 쿤드리의 행적을 보면 중간에 구르네만츠에 의해 언급되는 '무섭도록 아름다운 여인(ein furchtbar schoenes Weib)'이라는 말 외에는―다행히도 이 말은 2막의 처음에서 클링조르에 의해 쿤드리라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녀의 행적을 추리할 수 있는 단서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물론 이 경우는 약간의 근거가 있어서 클링조르의 대사인 "Was jagte dich da wieder fort(무엇 때문에 또 그렇게 멀리 떠났단 말이냐)?"라는 말에서 클링조르의 곁에 있었을 것이라는 미약한 추측을 할 수 있기는 합니다만.

어찌 되었든 이러한 사항들 또한 의문의 여지를 충분히 남길 만한 사항들입니다. 생각하다 보면 파르지팔은 뜻밖에도 늙은이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고, 쿤드리는 영원히 늙지 않는 마녀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해서 파르지팔은 진짜 소년일지도 모르고 쿤드리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단순한 여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건들의 해석에도 '판타스마고리'의 개념을 적용시킬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이 정작 작품 내부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서사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비현실적인 것의 절대적 현존'이라는 개념에 다름 아닙니다. 결국 거시적인 시공간의 흐름 뿐 아니라 미시적인 시공간의 흐름에 있어서도 <파르지팔>은 여전히 '판타스마고리'에 의해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5. '판타스마고리'와 무의식과의 관계

<파르지팔>이라는 작품에서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지배하고 있는 '판타스마고리'는, <파르지팔>이라는 작품을 듣고 있는 관객들 및 감상자들의 생체 시계를 멈추는 기능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판타스마고리'는 작품 내에 감상자가 저절로 빠져들게 함과 동시에, 작품 내에 한번 빠져든 감상자가 작품의 시간적 흐름에 대해 알려고 하면 할수록 그 감상자로 하여금 더욱더 '판타스마고리'적인 시공간의 흐름에 빠져들게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최면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파르지팔>의 '판타스마고리'에 빠져든 감상자는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대해 잊어버리게 되는"공간적·시간적 무의식의 순간"을 체험하게 됩니다. <파르지팔>을 보기 위해 극장에 들어간 감상자는 작품이 시작된 이후 시간이 얼마나 흐른 지도 모르는 채 <파르지팔>이라는 작품의 '판타스마고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빨려들어갔다가 작품이 끝나면 비로소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물론 손목 시계를 보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는 합니다만). 그러므로 <파르지팔>을 감상함에 있어서 무의식의 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러한 시공간의 흐름에 빨려들어갔다가 나오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과정은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는 순간에는 전혀 이러한 느낌을 받지 못하다가 작품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체감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오게 됩니다.

6. 맺음말

이상으로 <파르지팔>이라는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무의식과 그 원동력이 되는 시공간의 구성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파르지팔>이라는 작품에 있어서 시공간은 '판타스마고리'의 지배를 받으며, 이것이 감상자로 하여금 최면 상태와 비슷한 무의식의 상태를 느끼게 하는 원인인 것입니다. 분명 <파르지팔>이라는 작품의 시공간적인 구성에 있어서 이토록 극명하게 나타나는 '판타스마고리'는 아도르노로 하여금 바그너를 비판할 수 있는 최대의 논거를 던져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바그너 감상자들로 하여금 <파르지팔>이라는 작품에 더욱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장치로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 윗 글에서 나오는 '판타스마고리(Phantasmagorie)'의 개념은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계시는 김문환 교수님의 저서인 <바그너의 생애와 예술─총체 예술의 원류>(ⓟ 1989, 느티나무사 발행) 203페이지에 언급된 내용을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무의식'―이것은 어쩌면 바그너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소이기도 할 것입니다. 특히 <파르지팔>의 감상에 있어서 이것은 굉장한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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