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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원 (2002-02-20 15:41:13, Hit : 3095, Vote : 533
 ★★ [마술피리]와 [파르지팔]의 비교 (2000/05/19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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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파르지팔을 학구적으로 연구 접근하시는 하이텔 고전음악
동호회의 유지원님의 글을 허락을 받고 무와산방에서 옮겨 놓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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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술피리]와 [파르지팔] 비교 <<

유 지 원


이 글은 오스트리아 비인 국립 도서관을 통해 구한
1906년의 연간지 [Richard Wagner] 제1호에 실린 기사
"Mozarts [Zauberfloete] und wagners [Parsifal]: eine Paralle" 를
번역한 뒤 구성을 재편집하고 제 의견을 첨부한 것입니다.
장식이 너무 많아 가독성이 전혀 없는 독일 고어체와 씨름하며 많은
생각을 통해 끌어낸 결론입니다. 제한된 시간에 말로 하는 진행의 한
계상 자세한 내용을 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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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특유의,
고도로 상징적, 추상적이며,
독특한 종교관을 가진 두 대작곡가의 마지막 오페라이며,
같은 기원을 두는 남성 결사를 다루며,
신비주의적 전통에 입각하며, 권선징악적 주제를 다루며,
당시 인간에 대한 발견을 강하게 투영시킨
<<바그너의 [파르지팔]과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이 두 작품에서는 빛과 암흑의 대치가 다루어진다.
자라스트로와 그의 신성에 대립하는 밤의 여왕, 그리고 성배기사단과
그에 대치하는 클링조르. [마술피리]와 마찬가지로 [파르지팔]에서도
남성 결사의 광휘와 선한 규율이 상징되어 있고, 그들은 인간의 최고
가치를 수호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에 반하여 암흑과 악한 규율이 남성다움의 대립물로서 표현된다.
이 악한 규율은 [마술피리]에서는 밤의 여왕으로, [파르지팔]에서는
남성의 권외에 선 클링조르, 꽃의 여인들, 쿤드리의 형상으로 나타난
다. 또한 반대편의 손아귀에 있던 귀중한 물건을 탈환한다는 유사성
이 두 작품에 자리잡는다. 이러한 공통된 상황에서 인물들의 성격도
유사성을 가진다.

타미노와 파르지팔의 공통점은 명백하다. 그들은 용감하고 수동적인
영웅이며, 각각 인내와 체념을 통하여 목적에 다다른다는 점에서 일
치한다. 둘다 도덕적 정화과정을 거쳤고, 그 주요한 시험을 통과했으
며, 그 시험에서 육체적 본능과 여성적 유혹을 이겨내었다.

파르지팔은 꽃의 여인들뿐 아니라, 무섭도록 아름다운 쿤드리의 유혹
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타미노는 자라스트로에 대해 경고하는 동시에
파미나의 초상화를 보여주면서 유혹하는 세 시녀의 꼬임에 저항한다.

파미나와 쿤드리는 평행 관계에 한층 근접해있다. 클링조르에게 붙잡
혀 있으면서 동시에 성배 기사들의 전령이었던 쿤드리의 이중성은 파
미나에게도 나타난다. 파미나는 확실히 어머니인 밤의 여왕에게 속해
있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친구이자 권고자인 자라스트로와도 무관하지
않으며, 타미노의 뜻에 따라 어머니의 반대편에 선 절대지의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있다.

쿤드리가 3막에서 파르지팔을 자신의 구세주이자 구제자로서 경건한
정열로 바라보고 그에게 봉사하며 겸허히 몸을 낮추었듯이, 파미나는
타미노와 한편이 되어 사랑과 정화를 얻으려고 그와 함께 불과 물의
시련을 거친다.

쿤드리가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성배의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그 겸손함의 진가를 인정받듯이, 파미나 역시 [마술
피리]의 결말에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신성한 자라스트로의 왕국에
받아들여지고 연인과 함께 절대지의 왕관을 쓰게 된다. 쿤드리의 죽
음은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구제를 뜻하는 것으로, 이 두 여성은 각각
자신이 이루고 싶어하던 것을 성취한다.

자라스트로와 구르네만츠.
자라스트로는 자신의 왕국에 침입하려한 타미노에게 기회를 주고, 구
르네만츠는 백조를 쏘아죽인 파르지팔의 진가를 알아본다. 또한 자라
스트로가 침묵을 강조하며 자신의 왕국의 비밀을 지켰듯이, 구르네만
츠는 비밀로 가득한 성찬의식의 장소에 아무 암시없이 파르지팔을 데
려왔다.

파파게노와 파파게나의 유쾌한 커플만이 이 평행 관계에 대입하기에
모자란 감이 있는데, [파르지팔]에는 그에 걸맞는 상대가 없다.

그러나 이 두 작품 모두에는 진리를 바라지 않고 그 육체적인 세계에
만족하며 머물러 있는 순수하고 선량한 본능은 다같이 형상화되어 있
다. 우리는 [파르지팔] 1막의 쿤드리에게서 이러한 본능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아까 언급한 파미나-쿤드리의 대응에 분열이 생기는 것
을 우려할 수 있으나, 이러한 파파게노 커플에 대응하는 쿤드리의 모
습은 오히려 바그너가 자기 특유의 방식으로 그러한 본능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이 있는 반면 이 두 작품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
다. [마술피리]에서 자연은 무해하고 유쾌하며 밝은 에너지로서, 자
신의 좁은 범위 안에서 마음 편하게 뛰노는 것으로 보인다. [파르지
팔]에서는 반대로 암흑같고, 데모니슈하고, 거칠은 힘으로서, 유혹의
마법으로 정신을 궤도에서 이탈시키는 저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바그너가 천재적으로 쿤드리라는 인물을 형상화한 기독교적,
금욕적 견해이다. 모차르트가 파파게나와 파파게노에게 투영한 것은
18세기에 자연을 보는 견해이다.

[마술피리]에는 밝고 편견없는 계몽주의의 정신이 있고, [파르지팔]
에는 쇼펜하우어가 19세기에 갱신하면서 관념적인 형태를 끌어내었던
중세와 성직자들의 암울한 정신이 있다. 계몽주의의 암호는 이성과
진리의 힘, 인간의 고귀함과 선량함, 그리고 세계의 뛰어남에 대한
순진한 신뢰로 나타나는 낙천주의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마술피리]에서의 연인들의 고통과 위험은 그다지
진지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을 좌우하는 운명은 어차피 최상으로
향하게 될 것임에 분명하고, 그것은 온화하고 친절한 자라스트로에
의해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술피리]는 유희와 같은 낙천성을 지닌다.
그에 반해 [파르지팔]의 작가는 쇼펜하우어 철학의 신비적인 어스름
을 관통한다. 그는 우리가 삶을 방황하는 것이 다난하고 고통에 가득
차 있다는 것과 인간의 본능은 악하다는 것을 안다. 인간성의 상징적
표상을 보여주는 성배 기사단은 자라스트로의 말에서 울려나오는 내
적 고요와 신적 고결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의 왕 암포르타스는 죄의식에 억압되고 고문과 같은 시련을 받는
분열된 영웅이다. 성배의 성의 벽에는 다시 비탄이 울린다.
(이 벽이라는 뜻의 Mauer는 이집트 신비주의적 사제단과 성배기사단
의 맥을 잇는 '프리메이슨'과 동음이의어이다.)

이렇듯 '파르지팔'은 삶과 고통에서 '구제'받는 것을 설교하는 반면,
'마술피리'는 사랑과 우정의 새로운 삶을 향하는 인간을 '찬양'한다.
이 두 작품 중 어느 것이 더 심오하냐고 묻는다면 의심할 나위없이
[파르지팔]이다.

이 작품이 그 정점에 셸링, 헤겔,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표현했던 사
변적인 철학을 바탕으로 한 강력하고 영적인 전개를 펼치지 않았더라
면, 그같이 창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인간 이해보다 사색이,
모차르트가 살던 계몽주의 시대보다 바그너가 살던 염세주의적인 19
세기가, [마술피리]보다 [파르지팔]의 사상적 가치가 그토록 높은 것
이다.

모차르트의 18세기는 이성을 발견한 시대였고, 그럼으로써 인간은 인
간의 사고 속에서 재 탄생을 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인간상은
18세기에는 한낱 미숙한 모습이었고, 19세기에 이르러 성숙해진다.

바그너의 '축전성극'의 미학적 외관을 통하여 우리는 형이상학의 상
징적 깊이를 직접 대면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 속에서 사물의 토대를
직시한다.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이 이성으로 개화될 줄 알았던 18세
기의 꿈이 허물어지고, '이성으로 자각하지 못한 자'가 여전히 존재
한다는 사정을 알게 되며, 그들을 이해함으로써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변을 하게된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는 그러한 깊이를 품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18세기의 상황만을 노래하고 있고, 이것을 우
리시대와 관련시키는 것은 순박하고 솔직한 어린이가 성인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을 비교하면, 100여 년에 걸쳐 인간의 정신에 대한
사고의 전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형상화 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마술피리]는 18세기의 [파르지
팔]이요, [파르지팔]은 19세기의 [마술피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꾸밈없는 추상으로 형상화된 18세기의 작품 속에는 우리와 대
면하는 어떤 구체적인 가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가치를 우리는 [파르지팔]에서 끌어올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그너의 [파르지팔]은 [마술피리]의 가장 아름답고 심
오한 해석인것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바그너의 의도는 단지 바이로
이트에서 자신의 작품을 상연하려는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거장으로서의 약속을 예술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즉 바그너는 자신을
신으로 여기며 감히 구원의 약속을 한다. 물론 오늘 1999년에 이르
기까지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만일 그 어떤 작품이 바
이로이트에서 상연될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일 것이고, 그 이유는 예술적인 의미에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것이
여느 작품과 달리 '축전극(Festspiele)'으로 분류될만한 골자와 정신
을 지닌 작품이기 때문이다.







★★ [파르지팔] 마지막 작품-신앙적인 작품인가?
파르지팔 게시판을 새로 엽니다. (2000/05/1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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