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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삐율 (2002-02-25 18:43:33, Hit : 2638, Vote : 447
 ★★ <팔르지팔에 대한 불교적 이해를 위해> (2002/02/23)

2002/02/23 (21:01)


Carl Suneson이란 사람이 쓴 <리햐르드 바그너와 인도의 정신세계>라는 책이 있어요.
한국엔 없는 책입니다. 저도 독일어로 읽었는데, 독일엔 이렇게 동양철학과 바그너를 연결해 분석한 책이나 논문이 많아요.
정말 뭘 읽어야할지 모를 정도인데, 이 책을 오래전부터 바그너를 연구하고 계신 저희 학교 드라마투르기 선생님이 복사해 주시더군요.
그리고, 인지학(Anthroposophie)의 입장에서 쓴 책이 있는데
Friedrich Oberkogler의 .
- 이 책 정말 좋아요. 유감스럽지만 이 책도 한국엔 번역본이 없어요. 하지만
제가 가끔씩 이 책의 내용을 간추려 올리도록 하죠.

바그너가 불교에 관심을 갖고, 영향을 받았다는 건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근데, 그렇다면 오히려 불교나 동양적 사상 쪽에서 바그너를 보는 연구를 동양 사람들이 더 많이 해야 더 연구가 깊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파르지팔 대본을 읽으면서도 '뭔가 기독교적 얘기만은 아니다', '이러 이러한 것은 동양적 사상, 특히 불교적 감수성인 것 같다'라는 느낌은 있었거든요. 예를 들어 구르네만츠가 쿤드리에 대해, 아마도 전생에 지은 죄를 씻지 못하고 여기서 이루려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확실히 기독교에 없는 사상입니다.
우리 쪽에서 바그너를 보는 것과, 서양 사람들이 동양사상을 막연히 낯선 입장에서 연구해 바그너를 바라보는 것과는 다를 거예요.
아래 적어나갈 내용은 그러나 그런 입장에서 제가 바그너를 연구해 적은 건 절대 아닙니다.
별다른 건 아니고, 우리의 인지력으론 충분히 다 알고 있을만한 내용일 겁니다.
그리고 파르지팔을 분석하려한 것 또한 아님을 말하고 싶군요.
전 단지 생각의 자료를 제공하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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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르지팔에 대한 불교적 이해를 위해>

불타佛陀 (Buddha)는 '깨달은 자’'환히 아는 사람'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의 음역이다.
불(佛), 부타(浮陀), 부도(浮屠), 부두(浮頭)라고도 한다.
깨달은 사람, 아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불타 즉 부처는 석가세존에게만 국한된 절대적인 명칭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불타는 일체법(一切法), 즉 우주 만법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서 더할 수 없는 진리를 체득한
대성자(大聖者)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러한 대성자가 석존이기 때문에 그를 불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석존처럼 우주 인생의 진리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진실되게 이해하여 실천 파악하고 자기화시켜,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인격을 완성한 이를 가리킨다.

이러한 불타는 생신(生身)과 법신(法身)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부처의 육신(肉身)을 생신불(生身佛)이라 하고, 부처가 얻은 부처의 본성인 진리[法]를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하여, 2,500여 년 전에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역사적 불타인 석존은 생신(육신)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타라고 할 때에는 보통 법신불을 말한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을 지녔으므로 과거부터 부처의 성품을 개발하여 성불(成佛)한 이가 많았을 것이고,
또 미래의 헤아릴 수 없는 동안에 발심수행(發心修行)하여 마땅히 성불할 자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현재 ·미래와 온세계에 모래알같이 헤아릴 수 없는 부처들이 출현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부처가 출현하지만 이는 모두 큰 법신불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부처는 세 가지의 공통된 것이 있으니, 어느 부처를 막론하고 모두
수행을 쌓는 것이 같고,
법신이 같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같다.
부처(불타)는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여>, 깨달음의 활동이 언제나 가득하여 부족함이 없이 원만무애(圓滿無碍)하다.
즉, 자기도 깨닫고 남도 깨우치는 온전한 인간상이다.

- 이상은 야휴 백과사전의 내용을 간추린 것.


Durch Mitleid wissend (자비심으로 깨달음을 얻는)
Der reine Tor.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은 자비(Mitleid)를 통해 통찰할 줄 하는, 즉 깨달음을 얻은, 다 아는 사람이다.
Mitleid라는 단어는 Mit(함께)과 Leid(참고 견딤)이란 두 단어가 결합해 동정/자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비란 무엇인가? 자비는 남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비를 <베푼다>고 말한다. 동정 역시 마찬가지다. 동정을 <구한다> 하고, 동정을 <베푼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Mitleid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Mitgefuehl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한 구절을 인용해야할 것 같다.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언어들은 모두가 <동정>이란 단어를 'com-'(함께라는 뜻)이라는 전철과, 원래는 <참고 견딤>이라는 의미였던 'passio'라는 단어로 만들었다. 다른 언어들, 예컨대 체코어, 폴란드어, 스웨덴어 등은 이 개념을 하나의 명사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함께(Mit)>라는 의미의 전철과 <감정(Gefuehl)>이라는 단어로 구성되는 명사이다."

(한자로 동정을 써도 역시 위의 결합형태와 동일한 同+情 이다.)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언어들에서 이 'Compassio'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냉정하게 어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바라볼 수 없다. 혹은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한다. 대개 이와 동일한 뜻을 지닌 다른 말(영어: pity, 이태리어:pieta)에는 뿐만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 대한 관대한 마음씨 같은 여운이 모름지기 깔려 있다. Avoir de la pitie pour une femme는 <우리는 이 여인보다 입장이 낫다, 우리느 이 여인을 굽어본다, 우리는 자신을 낫춘다>를 뜻한다.
이러한 근거에서 <동정>이란 말은 불신을 야기시킨다. 그것은 사랑과는 그다지 많은 관련이 없는, 부차적으로 느껴지는 좋지 않은 감정을 표현한다. 누구를 동정하여 사랑한다고 함은 그를 진정하게 사랑하지 아니함을 일컫는다.
이 말을 <참고 견딤(Leid)>이라는 뿌리로부터가 아니고 <감정(Gefuehl)>이라는 명사에서 만들고 있는 언어들에서도 이 말은 대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이 부차적인 좋지 않은 감정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말의 어원이 지닌 신비한 힘이 이 말을 다른 빛을 띠도록 하며, 그것에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부여한다.<함께하는 감정(Mitgefuehl)>이란 어원의 동정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함께 체험한다는 것, 꼭 마찬가지로 모든 다른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쁨, 두려움, 행복, 고통 등. 이러한 동정(Mitgefuehl, Mitleid)은 따라서 감정적 표상력의 극치를, 감정 텔레파시의 기법을 표현한다. 감정 체계에서 그것은 제일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Oberkogler는 동정/자비(Mitgefuehl)는 다른 이의 생각이나 느낌과 운명으로 둘러싸인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가장 비밀스럽고 성스러운 것에 관여한 것과 함께 살게되고, 우리의 자아영역에서 다른 존재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이미 초감각적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자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에 대한 극복의 첫번째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부처의 대표적인 덕성 중 두 가지가 바로 자비와 지력이다.
그러나 불교적 자비와 깨달음은 파르지팔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석가의 깨달음은 자비심과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었지만 파르지팔의 깨달음은 자비심과 사랑을 <통한> 깨달음이다.
그리고 파르지팔의 자비는 세계 고통의 체험이란 면에서 예수의 자비와 같다. 즉, Mitgefuehl(함께 느끼는 것)에서 부터 Mitleid(함께 참고 견디는 것)까지 그는 체험했고,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을 때, 어느날 악마에 의해 <인식의 빛>이 주어졌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자 눈이 밝아졌고(즉, 인식의 순간) 선과 악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된다.(파르지팔이 쿤드리의 키스로 인해 깨달음을 얻은 것도 이와 같다.)
사랑은 이와 반대로 사랑의 여신 프레이아적 힘으로서 전체 피조물에 밀착되어 들어 있었다. 신의 첫번째 피조물이 그러한 것에 기초해 있는 한, 그리고 인식이 악마의 선물이었던 한, 사랑과 인식의 빛은 따로 떨어져 있었다. 선악과는 이기주의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 악마적 유혹은 <자기체험에 대한 획득>을 위해 필수불가결했다.
이 자기감정이란 것은 사랑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물리적 육체성을 통해, 즉 세속적 존재라는 것으로 인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공동체적 정신/영혼이 그들의 의식을 이끌어내며, 그들은 공동체적 화합을 만들어 낼뿐, 동정도 자비도 발전시키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되었던 것은 바로 사랑의 새로운 주체를 심기 위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사랑은 떨어져 있는 존재를 서로 붙여 놓는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말할 때, <...과...>라는 단어를 없앤다는 건 사랑을 없앤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의 수많은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의 가르침에서 공통된 요소는 바로 자비 혹은 사랑이 인간 영혼 사이에서 작용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파르지팔. 그의 역할은 바로 이 떨어진 <인식의 빛>과 <사랑>이 다시 함께 흐르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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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갑자기 생각이 동시에 여러가지로 복합되어 문장들이 간혹 튀기도 한 것 같군요.
이해하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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